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 |
인류 지식의 보고, 역사
역사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알아야 할 지혜의 보고가 숨겨져 있다.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서 삶의 지혜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행착오나 과거를 피할 수 있다. 오늘부터 집념의 역사가 사마천이 저술한 동양 최고의 역사서 [사기] 중 ‘열전(列傳)’ 편을 살펴보며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번 편에서는 사기(史記)와 저자 사마천의 일생에 관한 소개를 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다. 그런데 시험을 보기 위한 암기과목으로만 외울 뿐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 이는 거의 없다. 이런 상황이니 독립운동가를 모르거나 테러리스트로 오해하는 학생들이 생기는 것이다. 학생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잘못된 거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인류가 살아온 발자취다.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사고 방식은 비슷하다. 역사를 배운다는 건 과거 시행착오의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역사를 헤집어 보면 인류는 늘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실제 일어난 사건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기록자의 선택에 의해 수집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기록자의 주관과 의도에 따라 편집된다.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해당 사건뿐만 아니라 사건의 배경, 기록 의도, 중요성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수록 혜안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서, 사기(史記)
사기(史記)라는 역사책을 아는가? 자세히는 몰라도 누구나 최소한 이름은 알고 있을 중국 역사책이다. 서양에 헤로도투스의 [역사]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위상을 가진 책이다.
중국 전한(前漢)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전설의 황제들인 오제(五帝)로부터 한무제 시대인 기원전 101년까지 중국과 이민족의 역사를 저술한 중국 최초의 통사(시대와 지역을 정하지 않고 서술하는 역사)다.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태사공서(太史公書 ; 사마천의 호가 태사공이었음)라고 했으나 위진(魏晋) 시대에 와서 [사기]로 부르게 됐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탄생한 역사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관이었다. 그의 집안 대대로 사관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도 천체를 관측하고 문헌과 기록을 관리하는 태사령이었다. 사마천은 타고난 사관이었다. 그럼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답사다니면서 전승과 풍속, 주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기록하는 등 사관으로서 가져야 할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그가 36살이 되던 해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이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사인은 어처구니없게도 화병이었다. 당시 황제 한무제가 태산에서 열린 왕실 행사에 사마담의 참석을 거절했던 게 화병의 이유였다. 사마담은 사관으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무시당한 충격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면서 사마담은 아들에게 상고 이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부탁한다. 불후의 역사서 [사기]는 자존심에 상처 입은 아버지의 원한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운명의 갈래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고자 [사기] 저술에 착수했다. 당시 한무제는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흉노족을 섬멸하기 위해 다각도로 원정을 벌이던 중이었다. 기원전 99년 이광리 장군을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릉 장군이 중과부적 상황에서 적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릉 장군은 5천명의 보병으로 기마부대가 주력인 8만의 흉노를 상대했다. 화살이 바닥나고 부하들이 전멸한 상황에서도 이릉은 적군 1만 명을 죽인 끝에 실신한 채로 붙잡혔다. 이 정도면 상을 주어도 모자란 판이건만 한나라 조정은 반대였다. 나라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이릉을 처벌하기 위한 회의를 연다. 오랑캐를 정벌하러 보낸 장군이 포로로 붙잡혔다는 소식에 무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회의 분위기도 안 좋았을 것이다. 무제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이 모두 이릉의 처벌을 찬성한 가운데 사마천 혼자 이릉을 변호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가.
명예로운 죽음 대신 구차한 삶을 선택하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나선 대가는 사마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형과 궁형 중 선택을 강요당한 것이다. 궁형은 고대 중국의 5대 형벌 중 하나로 남/여의 성기를 손상해서 후손을 남길 수 없게 만드는 잔혹한 벌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사형을 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자발적으로 내시가 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한 불명예를 의미했다.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명예까지 감안하면 당연히 사형을 택해야 했던 사마천은 그러나 궁형을 택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출옥한 후 남자로서, 관리로서 실추된 명예를 안고 사마천은 더더욱 [사기] 집필에 전념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는 것 이외에도 남자로서, 관리로서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후대가 감복할 위대한 역사서를 남기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역사 서술방식의 모델이 되다
[사기]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전까지의 역사 기록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동양에서 가장 보편적인 역사 기록방식은 사건을 날짜순으로 정리하는 편년체였다. 공자가 노나라 역사를 기록한 [춘추(春秋)]가 편년체 방식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역사책이다. 사마천은 편년체 방식 대신 기전체 방식을 도입한다. 역사를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서술 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기(紀)·전(傳)의 이름을 따 기전체(紀傳體)라고 한다. 기전체는 통치자를 중심으로 주요 인물의 전기, 제도와 문화, 경제, 자연 현상 등을 서술해서 시대의 특징을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동 시대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생생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기전체는 중국 왕조의 정식 역사 기록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도 기전체로 기록된 역사책이다.
탁월한 문장으로 묘사한 인간군상의 인생역정
비록 저술 계기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나 본인이 겪었던 재난과 맞물려 [사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사마천은 '가문의 전통을 잇고 소명의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궁형의 치욕을 딛고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사기]를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 저술 과정에서 특히 열전에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전설과 신화는 배제하고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료를 골라 기록했다. 열전의 시작을 이념과 원칙을 지키려다 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로 정하고, 마지막 편에 이권을 추구하는 이치를 서술한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두었다. 인간들이 도덕적 당위의 실천과 욕망을 추구하는 본능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까닭이다. 이를 통해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역동적인 인간’이 역사 창조의 주역임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의견을 제시했다. [사기]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애독되는 이유는 저자의 탁월한 문장 속에 다양한 인간들의 인생 역정을 깊이 있게 서술하면서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를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빛과 그림자
나는 사마천의 생애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빛이고 하나는 그림자라 할 수 있다. 그림자는 사마천이 이릉 장군을 옹호한 부분이다. 왜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한 걸까? 한무제의 성격과 흉노의 관계를 안다면 이릉을 옹호하는 순간 화가 닥칠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속된 말로 이릉 건은 이미 판결이 난 상태나 다름없었다.
혹시 사마천은 상황을 오판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인의 위치를 과신한 나머지 일이 잘못되어도 기껏해야 귀양이나 태형 정도로 끝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역사가로서 사마천은 춘추전국 시대에 아무 죄가 없더라도 제왕의 기분 여하에 따라 얼마나 많은 신하들이 죽었는지 잘 알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도 황제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에 반하고 나선 것은 자신의 위치를 너무 과신했던가, 아니면 평소에 고지식하고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린 나머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천명을 탓하기에는 사태 파악을 못한 그의 책임이 너무 크다.
두 번째로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고 후대에 남길 역사서를 남기기 위해 죽음보다 힘든 치욕스러운 삶을 선택한 그의 정신이다. 당시라고 환관이 된 사마천에 대한 험담과 손가락질이 없었을까? 하지만 사마천은 큰 미래를 위해 작은 현재를 희생했다. 그 결과 인류사에 영원히 기억될 이름을 얻었다. 더 큰 운명과 업적을 위해 순간의 굴욕을 참을 수 있는 자가 대인이다. 유방의 신하 한신도 더 큰 미래를 위해 굴욕을 참고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았던가. 사마천의 고사는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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