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진명의 소설 <살수>를 읽게 되었다. 수양제의 백만 대군의 침략을 물리친 을지문덕의 기지와 담대한 전략, 고구려 지휘부의 일사불란함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었다. 을지문덕은 분명히 뛰어난 장수이자 전략가였지만 그를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한 고구려 영양왕 또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수나라-고구려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살수대첩이라 할 수 있다. 을지문덕 = 살수대첩의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런데 김진명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수대첩에 대해 갖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7세기 고구려의 건설기술로 6개월만에 청천강을 막을 수 있었을까?)
청천강에 대해 알아보고, 청천강의 크기에 일단 놀랐다. 북한에서 다섯 번째로 큰 이 강을 소가죽을 이어서 만든 보로 가두어 둔다? 이건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판타지밖에 안 되는 상황이다.
수나라 대군을 통쾌하게 쓸어버리는 스펙타클한 장면도 좋지만 이 정도 뻥이라면 외국 사학자들에게 씹히기 십상이다. 확실한 역사적 근거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당시 살수 전투를 수공이라고 기록한 역사서도 없다고 하니 무조건 주장만 할 일이 아니다.
정주영 회장이 서산간척지 사업을 할 때 동원했던 유조선 공법까지 알아보니 청천강을 당시 기술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찌어찌해서 중간까지 막았다고 해도 물살이 세진 가운데를 막는 건 오늘날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다.
살수대첩으로부터 400년 후 요나라 군과 강감찬의 삼교천 전투 시 수공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이유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을 막지는 않고 물을 이용해서 요나라 군의 전열을 흐뜨러뜨리고 기습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정도였을 것이다. 삼교천은 청천강보다는 작지만 길이가 100km에 이르는 강이니 말이다.
살수대첩이 수공이 아니라도 수나라 100만 대군을 맞아 물러섬 없이 물리친 을지문덕의 전공은 수천년이 지나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놀라운 전공이다. 공을 뻥튀기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전하는 게 을지문덕과 고구려인의 기상과 전공을 더 가치 있고 의미깊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가 살수대첩이 수공이라고 주장한 지 거의 1세기가 다 되어 가는데 역사학자들과 관련 분야 전문가라는 것들은 도대체 뭐 하고 있던 거냐?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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