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 범죄 |
영화를 만드는 두 가지 방법
대본을 구성하는 방법에 따라 영화는 두 가지로 만들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과정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차근차근 만들어가며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개연성을 확보한 상상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은 결과를 정하고, 과정을 짜맞추는 것이다. 결과가 정해져 있으므로 선택의 폭이 적어서 빠른 시간 내에 마무리가 가능하다. 다만 작가의 능력에 따라 설득력과 개연성이 현저하게 떨어질 우려가 있다. 같은 보물찾기 영화지만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첫 번째 방법으로 만들었고, <도굴>은 두 번째 방법으로 만든 느낌이다.
개연성과 설득력을 도굴당한 영화
필자는 영화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개연성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독자나 관람객이 이야기 전개 과정에 공감하지 못하면 몰입은커녕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상상의 산물이라 해도 개연성이 없다면 습작에 불과하다. <도굴>은 보는 재미가 있지만 아쉽게도 개연성은 두고 온 모양새다. 각 사건별로 결과를 정해 놓고 이야기를 맞춘 티가 역력하다. 자연스러우면 괜찮은데 앞뒤가 따로 노니까 문제가 된다. 영화를 감상하지 못하고 ‘저게 가능해?’나 ‘등장인물들은 다들 바보들이야?’와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도굴은커녕 목숨 부지도 어려운 주인공
강동구(이제훈)은 뛰어난 도굴꾼이지만 도굴품 거래시장에서는 철저한 약자다. 도굴한 유물을 현금으로 바꿔야 하는데 제값을 받기 쉽지 않다. 유물을 현금화하기까지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가 상대할 사람들은 권력과 폭력, 재력을 갖춘 상길(송영창)이나 상길의 하수인으로 더러운 일을 도맡아하는 광철(이성욱)과 같은 이들이다. 매순간 상대를 의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아마추어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데 강동구는 경계심이나 대비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들이 강동구의 입장으로 치환하기 어려운 이유다. 강동구처럼 느슨하게 행동하면 제 명에 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도굴이 제일 쉬웠어요
강동구 일행의 도굴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작업이다. 이렇게 편한 도굴이 있나 싶을 정도다. 연변 지하 무덤에 있는 고구려 벽화를 가져오는 과정이 편의점 물건 가져오는 것보다 더 쉽다. 이 장면이 상식적으로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따져 볼까? 강동구와 존스박사는 박스 하나에 벽화 석판 5-6개를 넣는다. 벽화 전체 크기를 감안하면 석판 50개, 8-10개의 박스가 필요하다. 석판 한 장의 무게가 대략 20kg라고 치면 박스 하나의 무게는 100-120kg, 박스 전체를 합치면 1.2톤 가까운 무게다. 이걸 공안이 감시 중인 무덤 속에서 길리슈트를 걸친 두 사람이 야심한 밤에 빼낼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던 개인수장고 약탈
선릉 도굴 건도 황당하지만 상길의 개인수장고 약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상길은 전문도굴꾼 출신으로 부를 축적해 온 인물이다. 도굴수법을 모조리 꿰고 있어서 수장고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최고 전문가를 불러 홍채 인식, 모션 센서, 지문 인식 등 최첨단 보안장비로 수장고를 지키고자 한다. 세 겹, 네 겹의 보안장치를 뚫어도 자신이 가진 열쇠가 없으면 수장고 문을 열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다 부질없다. 동구 일행은 바닥을 뚫고 수장고로 침입한다. 최첨단 보안 시스템이 지하를 관통하는 전통 침입 방식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고? 상식적으로는 보안 시스템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침투방안이 아닌가?
웃음보다 민망함을 야기한 코미디
범죄나 액션 영화에 코미디를 가미하는 건 감독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면 어설픈 코미디는 역효과만 난다. 감독은 제어할 자신이 있었나보다. 이제훈, 조우진, 임원희 트리오를 앞세워 능글능글하고 싼 티 나는 코미디를 선보인다. 웃음이 아니라 민망해진다. 코미디가 개입하면 곤란한 상황에서 자꾸 시도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여차하면 강동구 일행을 죽이려 하는데 그 앞에서 농담 따먹기만 연발하다니 아무리 좋게 봐도 무리수라는 생각만 든다.
고민 없이 결과에 과정을 맞추기 급급한 영화
마지막으로 감독이 준비한 반전조차 의문이다. 그 어려운 도굴을 하고 난 후에 기껏 한다는 게 자진반납이라니. 감독은 극중 주인공들이 ‘도굴꾼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모양이다. 행동이나 생각으로 보면 강동구 일행은 도굴꾼을 가장한 첩보원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필자가 기대했던 강동구 일행은 신안앞바다 보물을 도굴하는 윤태호의 만화 <파인>에 등장했던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돈만 아는 철저한 악당들이었다. 결과에 과정을 맞추는데 급급하다 보니 과정을 수행해야 할 캐릭터 설정도 미흡했다. 자연스럽게 이들 행동의 당위성에 대해 의문이 남게 되었다. 영화의 흥행을 원한다면 과정을 무시하고 결론만 추구하는 도굴은 곤란하다. 발굴을 해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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