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성 문화

미스터리를 가장한 지루한 신파, <내가 죽던 날>

by 마인드 오프너 2021. 1. 8.
반응형

제목을 보면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이 생각나는데 이야기 전개는 실망스럽다.

 

장르 : 드라마
상영시간 : 116분
개봉 : 2020.11.12.
감독 : 박지완
주연 : 김혜수
등급 : 12세 관람가
누적관객 : 233,112명

 

 


한국의 캐서린 비글로우를 바란다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영화감독 중에 캐서린 비글로우라는 여자 감독이 있다. 이 감독은 스릴러와 액션 영화를 정말 잘 찍는다.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이 인정할 정도다. 어지간한 남자 감독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녀가 찍은 영화 중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고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은 제이미 리 커티스 주연의 <블루 스틸, 1990>, 키애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즈 주연의 <폭풍 속으로, 1991>, 제레미 레너 주연의 <허트 로커, 2008>가 있다.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여자로서 알기 힘든, 남자들 간의 끈끈한 우정과 감정선을 남자들보다 더 섬세하게 붙잡아내면서도 스토리텔링에 재미와 감동까지 얹어낸다는 점이다. 한국의 여자 감독들이 대부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자들의 자아실현이나 독립을 주장하는 영화 연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허트로커>. 폭탄처리반 미군들의 삶과 전쟁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미스터리를 가장한 여성의 자아 발견

 

영화 관람 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기대했던 영화의 내용과 실제 영화의 전개가 다를 때다. 이럴 경우 몰입하기가 힘들다. <내가 죽던 날>은 미스터리를 가장한 드라마다. 유서를 남기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보이는 소녀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이야기다. 분량으로 따지면 미스터리 90%, 드라마 10%으로 봐야 할 것이나 미스터리 영화가 가져야 할 주요 요소들은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사건 해결보다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형사를 위한 솔루션이다. 자아 발견이 주제이다 보니 사건의 쫀쫀한 구성과 재미는 감독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실종된 소녀와 형사의 새로운 출발이 중요할 뿐이다. 구성이나 전개 방식이 새롭지도 않을뿐더러 흥미를 유발할만한 ‘꺼리’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결말 10분을 만들기 위해 감독은 지독히도 지루하고 장황한 자아 찾기의 맵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범죄자가 된 아버지 때문에 섬으로 와 있는 소녀 세진의 갑작스런 실종과 그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 영화의 90%를 차지하지만 미스터리 영화가 갖춰야할 요소들을 찾아볼 수 없는데다 주인공의 심경 변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동기가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재미는 실종, 의미만 가득

 

얼마 전 본 영화 <소리도 없이>와 이 영화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주제와 표현 방식에서 그렇다. <소리도 없이>는 표현 방식에서 기존 방식을 완전히 벗어난 영화라 할 수 있다. 제대로 감독의 의도를 읽지 못하면 당혹스럽다. 대신 의미만 제대로 이해하면 이보다 충격적일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에서 도돌이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태인(유아인)의 절망을 이토록 절절하게 그릴 수 있을까? 반면 <내가 죽던 날>은 주제도 구태의연할뿐더러 표현 마저도 신파적이다. 장편영화로서, 대중영화로서 갖춰야 할 재미조차 없다(여성 드라마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관객이라면 평가가 다를 수도). 뻔한 이야기와 충분히 예상되는 결말은 마지막 한 방을 기대하던 관객의 바람마저 철저히 외면해 버린다.

 

주제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온갖 잡다한 일화들이 마치 TV드라마처럼 일일이 들어가 있어서 흐름을 방해한다. 


선수 교체! 주인공을 대신하고 나선 감독

 

주인공인 현수(김혜수)의 ‘자아실현을 통한 새 출발’이라는 주제를 전하는 방법 역시 공감하기 어렵다. 현수는 경찰 대학 에이스로 불렸던 엘리트였으나 수사 도중 실수로 징계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여기에 외도한 남편의 이혼 소송으로 절박한 심정이다. 다행히 그녀의 상사가 편의를 봐준 덕분에 수사만 잘 마무리하면 궤도로 돌아가는 것은 큰 문제없어 보인다. 남편과의 관계나 직장 내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현수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는 게 당연한 흐름이다. 그런데 현수는 세진 실종 사건을 수사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동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는 동기보다는 억지춘향식 주제 강요만 보인다. 어느 새인가 현수는 사라지고 감독이 그 자리를 꿰어 차고 있는 모양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현수라면 생면부지의 소녀 수사를 위해 가진 걸 모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 영화의 성패 여부는 현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고 새 출발을 하게 된 계기의 설득력 여부에 달려 있다. 

 

 

[ ★ ]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