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 소설 분야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토마스 해리스의 [한니발] 시리즈(한니발 라이징, 양들의 침묵, 한니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남녀 주인공인 한니발 렉터 박사와 FBI 특수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의 관계 변화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한니발 렉터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한 이유로 FBI의 수배범 1순위에 올라있는 최악의 범죄자이며, 클라리스 스탈링은 정의 구현만이 자신의 인생 목표라고 생각하는 타고난 수사관인데 말이죠.
저는 원작 소설 시리즈를 모두 보고 난 후에 영화 [한니발]을 보았는데 결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명장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 한해서는 원작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귀족 출신에 이기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한니발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손을 자른다는 설정은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소설에서 묘사되는 한니발과 스탈링의 디테일한 심리나 내면 묘사를 러닝타임의 한계가 있는 영화에서 전부 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상징적인 면이라도 두 사람의 개성을 알려줄 수 있는 부분들은 드러내어야 했습니다. 소설의 디테일을 너무 많이 생략하는 바람에 한니발은 사이코패스로 묘사되고, 스탈링은 흔한 FBI요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탈링이 한니발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한니발의 정신적인 치료법과 최면술에 기인한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외부 환경의 변화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하고 있던 트라우마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마약사범 소탕 작전 과정에서 존 브리검이 사망하고, 자신은 정직 처분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외톨이가 된 스탈링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던진 사람은 한니발이 유일했습니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자신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심정을 알아주는 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한니발 시리즈를 정독한다면 지금까지 간과했던 소설의 진짜 재미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작 시리즈를 읽고 난 후 영화도 보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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