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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문화

조선의 조직폭력배, ‘검계(劍契)

by 마인드 오프너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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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황정학의 옷차림과 무기가 검계 조직원과 흡사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범죄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들은 세력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조직을 만든다. 조직이 커질수록 사법권도 무시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탈리 아의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 중국의 삼합회가 좋은 예이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범죄 조직이 있었다. 검계라는 조직이다. 이들은 강도, 강간, 살인 등 사회를 위협하는 강력범죄들을 100여년이 넘게 저지르면서 조선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조직원의 신분

 

검계(劍契)는 숙종 때에 등장했다. 그후 약 120년 간 존재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검계는 원래 향촌에서 장례를 돕기 위해 조직된 향도계에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조직원은 주로 조선의 신분 제도에 불만이 많던 사람들이다. 서얼이나 중인 등으로 출세의 한계를 가졌던 이들이다. 이따금 관직에 있다가 실수나 범죄 등으로 도망자가 된 자들이 검계의 조직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영조 때 이름을 날렸던 검계의 우두머리 표철주도 원래 세자궁의 별감이었다.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면서 검계에 가입했다. 그가 죽지 않은 이유는 ’영조가 뒤를 봐주어서‘라는 말이 있다. 조직원들이 항상 검을 차고 다니기에 이 조직에 ’검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목표와 행동 강령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무(武)를 천시했다. 양반들이나 왕실에서 인격 수양 방안으로 즐긴 궁술이나, ‘놀이 성격”이 강한 씨름, 택견을 제외하면, 민간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궁술은 전쟁 시 수성전을 할 때 조선군의 주력이었기에 발전을 거듭했으나 검술이나 창술은 제대로 발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검계는 이러한 조선 사회의 이념에 반해서 ’무의 숭상”을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형이상학적인 무예의 발전을 꾀하거나 무예를 통한 보다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만과 사회를 향한 적개심에 기반해서 살인 기술과 폭력을 추구하며 겉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이들이 추구한 목표가 양반 살해, 강도, 약탈, 부녀자 폭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름과 달리 조폭이나 다름없는 범죄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이한 회원 조건

 

 

검계 조직원이 되기 위한 조건은 어처구니가 없다. 몸에 칼자국이 있어야 했다. 칼자국이 없으면 조직원이 될 수 없었다. 폭력적인 조직원들은 스스로 몸에 칼자국을 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이 정도만 해도 반사회 집단으로 경계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

이들은 창포검이나, 죽장도 같은, 무기처럼 보이지 않는 칼을 갖고 다녔다. 그런데 얘네들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 의도적으로 무기를 숨겼으면 옷차림도 숨기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반대로 행동했다. 누가 봐도 “쟤네들 검계 아냐?”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복식을 하고 다녔다.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허름한 옷을 걸쳤다. 얼굴을 가리는 삿갓을 쓴 채 눈 부위만 구멍을 뚫었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비가 오면 가죽신을 신었다.

이렇게 보니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에 등장하는 황정학과 기타노 다케시가 제작한 <자토이치, 2004>의 자토이치가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창포검 형태의 검을 갖고 다니며 남루한 옷을 입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맹인이지만 굉장한 검술로 상대를 해치운다. 검계도 대략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조직원들의 무예실력

 

 

검계가 온갖 패악질을 하면서도 120년 동안 존재했던 이유는 조직원 중에 집안이 좋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계는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무력 행위를 통해 발산하고자 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진법까지 연습할 정도로 무술에 목을 맸다.

영조 때 검계를 때려잡던 훈련대장 장붕익을 죽이러 검계의 자객이 집에 침입한 적이 있었다. 당시 무예가 높다고 조선 팔도에 소문이 자자하던 장붕익조차 이 자객을 잡는데 실패했다. 그 정도로 자객의 검술이 출중했다는 의미다. 이 자객이 검계의 우두머리인 표철주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가 영조의 세자 시절 호위별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일리 있는 주장이다. 검계 조직원 중에는 의금부 나장이나 별감 출신들이 있어서 무예가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검계 중 일부는 폭력 행위보다 돈벌이에 눈을 돌려서 주막이나 기생집 뒤를 봐주거나, 사채와 같은 돈놀이를 하는 부류도 있었다. ‘검계’에서는 이들 부류들과 동일시하는 게 기분이 나빴는지 이들을 '왈자'라고 불렀다.

 


 

‘검계’의 천적, 훈련대장 장붕익

 

 

무서운 것 모르고 날뛰던 검계 조직원들 앞에 영조 때 드디어 천적이 나타난다. 포도대장 장붕익이다. 포도대장은 왕의 신임이 있어야 하는 데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춰야 했고 수사 실력과 범인 검거도 잘해야 하는 까다로운 자리였다. 장붕익은 포도대장 부임 시 무려 80세였는데도 엄청난 추진력과 엄격한 법 집행으로 검계를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한다.

장붕익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취임 첫날 그가 순라군들과 야간 순찰을 돌던 중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던 별감을 만났다. 어지간하면 같은 관리끼리 봐줄법도 한데 장붕익은 그 별감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려 처벌했다. 처벌을 마친 후 장붕익은 부하들에게 “관리들의 범죄는 더 엄하게 다스려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 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는 법이다. 장붕익이 부임한 시점부터 검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장붕익은 방화 사건과 밀주 사건 등 여러 범죄에 검계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검계 조직원 일제 단속을 실시한다. 검계 조직원을 식별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수상한 옷차림과 무기를 살핀 다음 몸에 칼자국이 있나 확인하면 끝이었다. 장붕익은 체포한 검계 조직원들의 발뒤꿈치를 자르거나 죽여서 일벌백계로 다스렸다.

검계의 보스였던 ‘표철주’가 조직의 운명을 걸고 장붕익 암살을 시도하지만 그것마저 실패한 후에는 한양을 떠나 도망친다. 두목이 떠난 조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표철주는 2년 후 장붕익이 죽은 후에야 한양으로 돌아와서 부동산 소개 일을 하며 초라하한 말년을 보냈다. 장붕익의 활약 덕분에 검계는 영조 대에 모습을 감췄지만 조선이 혼란해지는 순조 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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