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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문화

리얼리티 쩌는 한국형 액션 느와르, <사생결단>

by 마인드 오프너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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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마약 액션 영화라기 하기에는 너무 주인공들의 일상 표현이 적나라하다. 

 

장르 : 느와르, 액션
상영시간 : 117분
개봉 : 2006.04.27.
감독 : 최호
주연 : 류승범, 황정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제목부터 이야기에 착 감기는 영화

 

산다는 건 결코 간단치 않다. 그냥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기 힘들다. 남들도 나만큼이나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가뭄에 콩나듯 성공한 사람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다. 한 마디로 그 일이 아니면 사생결단한다는 각오로 시간과 육체를 불사른 것이다. 황당하게도 폼 나게 살기 위해서 "죽을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가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그랬던가.“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영화의 제목인 <사생결단>이야말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단 4개의 단어로 간명하게 보여주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적과의 동침?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


 

마약 판매 VS 동료의 복수

 

IMF가 끝나고 마약이 급속도로 유행하고 있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약하는 마약 판매상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상도(류승범). 마약상이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마약을 해 보지 않은 인물이다. 마약 판매로 300%의 수익률을 올리며 잘 나가던 상도는 어느날 강력계 마약반 형사 도진광 경장(황정민)에게 잡힌다. 도경장은 상도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부산 마약계의 거물인 장철을 잡는 데 협조해주면 상도의 마약 건은 덮어주겠다는 것이다. 도경장이 함정 수사에 목 매는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다. 예전에 장철을 잡는 과정에서 동료 경찰이 염산을 덮어 쓰고 사망한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다. 두 사람이 합작한 함정수사는 체포 과정에서 용의자가 죽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실패로 돌아간다. 상도는 징역 8개월, 도경장은 휴직이라는 최악의 결과와 함께. 하지만 도경장은 포기하지 않는다. 복직과 함께 도경장은 상도에게 2라운드를 제안한다. 아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2라운드 결과는 어떻게 될까.

 

류승범은 비열하고 하이에나 같은 삶을 사는 이상도를 완벽하게 연기한다.


치열하고, 처절하고, 야비하며, 리얼한 이야기

 

예전에 어딘가에서 마약수사관이 마약사범을 잡을 때의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체포과정은 일반 강력범과 확연히 다르다. 약을 먹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야구방망이나 흉기를 들고 차 유리를 깨고 본다는 것이다. 설마 했는데 이 영화에서 마약판매범을 잡는 장면이 똑같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비열하고, 처절하며, 겉과 속이 다르다. 연출도 멋을 부리려 하지 않는다. 마약에 길들여진 중독자들이 실제로 어떤 증상을 겪는지 자료 조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금단 증상을 연기하는 지영(추자현)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마약을 복용하고 성관계를 하면 오래 간다는 이유 때문에 마약을 복용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희한하게도 이 영화에는 할리우드 마약 액션 영화처럼 멋있지도, 악당을 때려잡는 영웅들이 나오지도 않는다. 사방이 비열한 악당 천지다. 악당들끼리 속고, 속이며, 서로를 이용하고 거리낌없이 희생양으로 삼기에 영화는 거북하다. <영웅본색>처럼 소위 가오를 잡고 환상적인 액션을 펼치는 느와르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감독은 화면의 질감마저 영화의 톤앤무드에 어울리게 거친 질감을 접목하고 때때로 이상도와 도경장이 대립하는 장면을 화면 분할로 보여줌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결국 이러한 화면 연출은 두 사람이 시종일관 협조와 배신을 되풀이하며 사생결단으로 상생할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사생결단>과 같은 영화들은 감독이라면 누구나 만들고 싶지만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연기를 제대로 하는 배우들이 필요하다.

 

마약 판매자를 체포하러 가는 길에 도경감은 야구방망이를 꺼내 든다.


섬뜩하고 파괴적인 류승범과 황정민

 

영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은 류승범과 황정민이다. 비중이 엄청난 만큼 책임감도 남달랐을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는 두 사람이 얼마나 대본 상의 캐릭터에 동화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류승범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연기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이상도 역을 했으면 이 정도로 잘했을까 싶다. 비열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의심이 많고, 하이에나처럼 살아남고자 하는 이상도의 특징을 연기와 대사 속에서 흠잡을 곳 없이 해냈다. 류승범의 대척점에 있는 황정민 역시 무시무시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신세계>의 ‘정청’은 이미 이 영화에서 완성된 느낌이다. 장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순직한 동료 형사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필사적으로 수사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서 ‘연기란 아무나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이하게도 황정민은 순둥이처럼 연기할 때와 지독한 악인으로 연기할 때 모두 매소드 연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황정민은 동료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속죄하려는 도경감 역할을 기막히게 해낸다.


방향지시등과 브레이크 역의 조연배우들

 

자동차는 마음먹은 대로 잘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고 싶을 때 서고, 가고 싶은 방향을 뒷차에 미리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연출과 대본이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방향타 역할을 하고, 황정민과 류승범 두 주연이 엔진 역할을 했다면 조연 배우들은 방향지시등과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등장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단연 눈에 띄는 배우는 지영을 연기한 추자현이다. 그녀는 이 영화를 보기까지 이름만 알고 있었다. 연기를 위해 여배우의 자존심마저 던져버리고 꺼림직한 연기를 독하게 해내는 걸 보고 놀랐다. 솔직히 지영은 추자현 정도의 커리어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높다. 마약중독자인데다가 마약에 취해 홀딱 벗고 정사를 벌이는 씬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여배우들이 예술성 있는 영화를 위해 어쩌다 올누드 연기를 감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이상도의 삼촌이자 기술자로 등장하는 원로배우 김희라 씨는 전성기 시절과 달리 파렴치한 악인으로서 조카에게마저 멸시당하는 가련한 노인 연기를 무게감 있게 전해준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배역을 추자현은 기꺼이,  아주 독하게 연기해냈다.


 

나의 일상 너머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

 

이 영화를 <비열한 거리>가 떠올랐다. 비록 가진 것 없고 운마저 없는 흙수저지만 나름대로 주변 인물들에게 의리로 살고자 하는 병두는 비열한 세상 속에서도 혼자 빛났던 게 사실이다.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 과정에서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현실과 살짝 유리된 느낌이 나서 아쉬웠다. <사생결단>을 보며 불편하면서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인생곡절이 거리감이 있어도 내 일상과 크게 멀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상도나 도진광은 지지리 운도 복도 없었던 탓에 비열하게 살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어릴 때 마약판매상이었던 삼촌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마약판매상이 되었고, 동료 형사에게 진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과거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그 답답한 인생이 사실은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뀌지 않는 삶을 확 뒤짚어 엎기 위해 그들은 편안한 삶을 벗어던지고 위험을 감수하며 일탈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생결단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조인성이 연기하는 병두는 비열하지만 빛나는 아우라 때문에 약간의 유리감이 있다.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설득력 있는 결말

 

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실 결말까지 비열하게 끌고 가 놓고 해피엔딩으로 끝내면 그게 더 당황스럽다. 사실 필자는 이상도와 도 경장이 양패구상해서 함께 죽는 결말을 예상했다. 하지만 감독이 정의한 결말도 충분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도의 죽음은 어쩌면 스스로 원한 것일 수도 있다. 도 경장과 장철, 삼촌과의 관계를 통해 죽자사자 사생결단해도 본인이 꿈꾸는 미래를 손에 넣을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가 아니었을까. 혹은 도 경장과 삼촌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교실에서 윤리를 배우며 선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인생을 살라고 배운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현실은 교실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깨우침 이후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조금씩 변한다. 비록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악인이지만 이들도 처음부터 이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살기 위해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어쩌다 보니 모두가 경원시하는 삶에 들어섰을 것이다. 일단 들어선 이상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금 실수를 되풀이했고, 되돌아올 길을 잃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상도와 도경감은 확실히 보여준다. 이들의 내면이 지금까지 훏어주었던 것처럼 악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마저 들 것이다.

 

다른 결말도 생각해 보았지만 감독이 선택한 결말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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