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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문화

웬만한 추리소설 뺨치는 추리 무협 ; 이재일의 <삼휘도에 관한 12가지 이야기>

by 마인드 오프너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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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휘도>는 <다시, 칠석야>에 수록되어 있다.

 
다시, 칠석야. 1
사랑하는 여인의 아이가 납치되었다. 요구 조건은 살인청부. 삼산파의 파문된 대제자 만애청은 사부의 딸 황다영을 위해 강호행을 떠난다. 어린아이를 노리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이텔 무림공모전 대상에 빛나는 전면개정판. 지키는 자들을 위한 이야기 와 동시 수록.
저자
이재일
출판
새파란상상
출판일
2021.10.28

 

좀처럼 보기 힘든, 흥미로운 추리무협

 

웹소설로 내려앉은 무협 중에서 어느 정도 문학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무협이라는 장르가 어지간한 클리셰를 허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가라면 누구나 차별화된 작품을 쓰고 싶겠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어디선가 보던 것들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협에 추리 요소를 부가하는 건 더욱 어렵다. 20권, 30권 알맹이도 없는 내용을 반복하며 늘이는 것 쉽지만 재미와 수준을 유지하며 중편 이내로 결말을 짓는 것은 최고 난이도다. 이재일의 무협 <삼휘도에 관한 12가지 이야기>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작품이다. 압축과 함축이 많기에 대충 읽으면 이야기를 이해 못할 수 있다. 필자가 그랬다. 작가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사건은 반드시 결말과 연관이 있다. 두 번 읽는 것을 권한다.


한 문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필자가 일반 독자들보다 많은 책을 읽는 비결은 텍스트를 빨리 읽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소설은 2시간 이내에 다 읽는다. 이 작품은 완독은 빨랐지만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읽어야 했다. 작가가 곳곳에 숨겨 놓은 무대 장치를 발견해야 했다. 삼휘도가 탁발씨 가문의 호가영 중 한 명이며 가문 전체가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기획은 충격적이다. 이러한 기획 기반을 머리에 두고 있지 않으면 캐릭터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무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흥미로운 추리소설을 읽는다고 접근하는 게 좋다.


개, 가문, 운명을 혐오했던 삼휘도

 

제목 <삼휘도>는 주인공의 가명이자 주제를 상징한다. 휘(諱)라는 한자는 ‘기피하다, 꺼려하다’라는 뜻으로 세 가지를 싫어하는 칼이라는 뜻이다. 삼휘도가 싫어한 세 가지는 개, 가문, 운명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개는 삼휘도 자신일 수 있으며, 가문과 운명은 동격이 될 수 있다. 삼휘도는 탁발씨 가문에서 태어난 서출이다. 적출을 제외한 서출들은 모두 가문을 지키는 호가영이 되어 가주를 보호해야 한다. 문제는 가주가 청룡보주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다. 가주는 청룡보주 전 인원을 죽여 복수를 할 것을 호가영들에게 명령하고 그로 인해 호가영들의 슬픈 희생이 시작된다. 이 사실은 삼휘도가 사노반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결말을 예고하는 각기 다른 화자들

 

결말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흘러가는 이야기는 독자들의 의문을 자아낸다. 주인공인 삼휘도는 첫 장 이후 아예 등장하지 않고 각 장의 화자가 모두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으며, 심지어 엑스트라도 있다. 이들은 저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한다. 사노반의 동생 마장의 죽음, 관음비 홍독의 죽음, 화염검마 반풍의 죽음, 공공태감 암살 시도, 역이화의 이혼과 친정 복귀, 혈운장 공격, 흑과부의 암살 실패, 청룡보의 암도 공사 등이 느리게나마 서술되는 이유는 이 모든 사건사고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덫

 

삼휘도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만 호가영의 책무를 피하지는 않는다. 삼휘도는 ‘짓지 못할 것이 없는’ 무불축(無不築) 사노반 앞에 나타난다. 한 가지를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삼휘도는 사노반의 동생인 마장의 복수를 해준 후 사노반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의뢰한다. 청탁 내용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 수백명의 사람들을 생매장해야 하는 목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금씩, 천천히 가주의 복수를 위한 계략은 하나둘씩 다가오기에 청룡보주를 비롯한 가신들은 전혀 알아챌 수 없다. 복수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가족이라는 인연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문화와 습속에 대한 고찰로 이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가 있을까.


무협의 탈정형에 관한 시도

 

이 작품은 수많은 클리셰와 정형화된 설정, 수준 미달의 문장력 등으로 한계에 이른 무협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느낌이다. 무협에 추리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복선을 깔아놓은 후 결말에서 회수하는 기법은 신선하다. 주인공인 삼휘도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노반의 성과를 직접 서술하지 않고 편지 한두 줄로 짐작하게 만드는 축약도 대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스스로도 무협을 쓰는 게 가장 재미있다고 말했는데 최근의 무협계 상황은 신무협작가들이 날개를 펴기 어렵다. <서문반점> 연재 이후에 그의 새로운 작품을 못 보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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